요약
➊ “내연기관차와 전기차 중 무엇이 대세냐?”에 대한 논쟁이 전기차로 기울며, 전기차가 미래라는 인식이 대중의 머릿속에 점점 확고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➋ 테슬라는 광고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전기차가 미래다”라는 인식을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시키기 위해 오래 전부터 노력해왔는데요.
➌ 첫번째로, 테슬라는 로드스터, 모델 S 플레이드처럼 압도적으로 빠른 속도의 자동차를 만들며 “전기차가 최고의 자동차다”라는 메시지를 외쳐 왔습니다.
➍ 두번째로, 테슬라는 모델 S, X, 사이버트럭 등의 제품에 1900년대 SF 영화의 레퍼런스를 적극 차용했습니다. 이를 통해 대중들이 테슬라를 통해 어릴적 보고 자란 미래 자동차에 대한 향수를 느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직류 vs 교류
내연기관차 vs 전기차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좋아하시나요?
(영화 <커런트워>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컴버배치가 주연으로 출연하는 영화 <커런트 워>는, 1890년대 전기의 기술 표준을 두고 에디슨과 웨스팅하우스가 벌이는 치열한 싸움을 그립니다. 극 중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한 에디슨은 직류를, 마이클 섀넌이 연기한 웨스팅하우스는 교류를 미국을 밝힐 전기의 표준으로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데요. 누가 표준을 쟁취하느냐에 각 회사의 존망이 걸려있기에, 둘은 서로에 대한 네거티브 마케팅까지 불사하면서 사활을 건 대결을 펼칩니다.
에디슨은 경쟁 제품인 교류에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한 전기다”라는 프레임을 씌우기 위해, 기자들을 모아놓고 교류로 말을 감전시켜 죽이는 실험을 시연합니다. 또 사형용 전기 의자에 교류를 사용하도록 부추기기까지 하는데요. 실제로 웨스팅하우스의 핵심 연구원이 실험 중 감전 사고로 사망하면서 여론이 직류 쪽으로 기울었고, 웨스팅하우스는 파산 위기까지 몰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웨스팅하우스는 교류의 장점인 낮은 비용과 장거리 송전 용이성을 어필하면서 결국 싸움에서 승리하고, 에디슨은 패배에 승복하게 되는데요.
“커런트” 워(Current War)라는 중의적인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 이렇게 기술의 우월성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과 싸움은 인류 역사에서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내연기관차와 전기차를 놓고서도 이런 논란이 있었죠. 주행 중 매연을 뿜지 않는 전기차가 내연기관차보다 친환경적이라는 건 지금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인식은 정반대였습니다.
전기차가 달리는 데 필요한 전기를 생산하는 데 발생하는 환경 오염이 매우 심각할 뿐 아니라, 전기차 생산보다 내연기관차의 연비를 개선하는 데 투자하는 것이 환경에 더 도움이 된다는 의견이 많았죠. 또 배터리 생산에 필요한 금속 채취에 드는 오염도 만만치 않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기차의 성능도 너무 구렸습니다. 세계 최초의 양산형 자동차는 (테슬라가 아닌) GM에서 만든 “EV1”이었는데요. 1회 충전으로 달릴 수 있는 거리는 160km에 불과했고, 최고 속도는 130km에 불과했습니다. 때문에 환경운동가들이나 타고 다니는 작고 약한 차라는 이미지가 굴레처럼 따라다녔죠. 이런 압도적인 열위로 인해, 전기차는 이미 오래 전에 발명됐으면서도 제대로 상용화되지 못했습니다.
전기차가 미래라는 인식,
어떻게 생겼을까?
그런데 2021년 현재, 전기차에 대한 이미지는
20년 전과는 180도 바뀌었습니다.
내연기관차는 사라질 발명품이고, 전기차가 미래 자동차 시장을 지배할 것이라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 정부에서는 앞다투어 전기차를 보급하고 내연기관차는 퇴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GM, 폭스바겐, 현대차 등 대부분의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도 이에 호응하면서 전기차 중심 포트폴리오로 재편할 계획을 내놓고 있죠. 전기차가 내연기관차보다 더 친환경적이고 내연기관차 못잖은 성능을 갖췄다는 데에 쉽게 토를 다는 사람을 찾기도 힘듭니다. “충전 인프라만 잘 깔리면 내 다음 차는 전기차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제 주변에도 십 수명이 넘는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연기관차와 전기차 모델을 엑셀에 쭉 정리해 놓고, 주행거리와 최대 속도, 제로백, 충전 속도, 탑승감 등의 항목에 점수를 매겨 “이래서 전기차가 좋다”라는 분석을 거쳐 전기차를 사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은연중에 “전기차가 내연기관차보다 더 낫다”, “전기차가 앞으로의 미래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기차를 삽니다.
어떻게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걸까요?
왜 사람들이 갑자기 모두 전기차가
미래라는 데 동의하게 된 걸까요?
물론 내연기관차에 필적할 만한 스펙을 갖추게 된 전기차의 성능 개선도 한 몫 하겠지만, 오늘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꾼 테슬라의 2가지 마케팅 전략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1. 세상에서 가장 빠른 차를 만들다
2021년 6월, 일론 머스크는 모델 S의 새로운 트림, 플레이드(Plaid)를 공개합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팬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으면서 등장한 일론 머스크는, 모델 S 플레이드를 “포르셰보다 빠르고, 볼보보다 안전한 자동차”로 소개합니다.
실제로 플레이드는 콘셉트카가 아닌 양산차로는 믿기지 않을 엄청난 성능을 자랑하는데요. 최고 속력은 200mph, 즉 시속 320km에 달하고 정지 상태에서 시속 96km/h(60마일)에 도달하는데 단 1.99초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1회 충전으로 주행 가능한 거리 또한 무려 620km를 넘는데요. 자동차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 보더라도, 이게 일반 양산 차량이 맞나 싶을 정도의 괴물 같은 스펙입니다. 일반 내연기관차와 비교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누가 봐도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고요.
실제로 독일 뉘르부르크링 서킷을 달린 모델 S 플레이드는 단번에 신기록을 세우며 세상에서 가장 빠른 양산 전기차의 칭호를 얻습니다.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로 공개한 플레이드의 기록은 7분 30초로, 2년 전 포르셰 타이칸이 세운 기록보다 12초나 빨랐습니다.
사실 이렇게 압도적으로 빠른 차를 만들었다고 해서, 이 제품이 불티나게 팔려 테슬라의 메인 제품이 될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모델 S 플레이드는 일반 다수의 소비자를 타겟으로 만들어진 대중적인 제품이 아니기 때문인데요. 약 13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억 6천 만원에 달하는 고급 차량입니다. 이런 괴물 같은 차를 만들 수고와 노력으로 차라리 $25,000달러짜리 저가 전기차를 조금이라도 빨리 내놓는 게 차라리 테슬라 실적에 더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전기차가 누가 봐도 최고의 자동차라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플레이드를 타면, 마치 미래에서 달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 일론 머스크
그럼 테슬라는 왜 굳이
이런 제품을 애써서 만들어낸 걸까요?
그 이유는 일론 머스크가 플레이드 출시 발표회에서 직접 말합니다. “전기차가 누가 봐도 최고의 자동차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고요. 이는 테슬라의 첫 제품인 로드스터 때부터 이어져 온 전략입니다. “환경운동가들이나 타는 작고 약한 차”라는 이미지를 벗어던지기 위해, 테슬라가 만든 첫 제품은 스포츠카 로드스터였죠. 지금이야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당시만 해도 로드스터의 4초대 제로백과 300km를 넘는 주행거리는, 대중들의 머릿속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었습니다.
그 이후, 테슬라가 모델 S와 X, 3와 Y를 생산하면서 전기차가 대중에 점점 널리 보급됐죠. 이제 전기차의 가속력, 승차감, 주행거리 등 스펙을 내연기관차와 비교하며 깎아내리는 사람은 찾기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슬라는 계속해서 압도적인 성능의 슈퍼카를 출시하면서 전기차가 이렇게나 빠르고, 이렇게나 강력하다고 보여줍니다. “내연기관차보다 전기차가 우월하다”라는 이미지를 대중들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주입하려는 겁니다. 테슬라는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대중 광고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죠. 하지만 사실 이렇게 플레이드나 로드스터 같은 슈퍼카를 만들고 판매하는 것 자체가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2. 자동차에 미래를 오마주하다
모델 S 플레이드 공개 행사의 대표 이미지입니다. 이 이미지에서 이상한 점은, 차보다 배경에 더 시선이 꽂힌다는 겁니다. 플레이드의 겉모습이야 기존 모델 S의 외관을 살짝 바꾼 것에 불과하기에, 특별히 새롭지 않습니다. 또 하필이면 블랙 컬러인지라 디테일들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죠. 오히려 플레이드 주변의 배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검고 붉은 직선들의 조합으로 마치 시공간을 잇는 연결 통로에 있는 듯한 느낌을 떠올리게 합니다.
테슬라 홍보 담당자는
이런 이미지를 통해 뭘 의도한 걸까요?
답은 “플레이드”라는 이름에 있습니다.
“플레이드”는 1987년 공개된 영화 <스페이스볼>에서 따온 명칭인데요. <스페이스볼>은 스타워즈 시리즈를 패러디한 SF 코미디 영화입니다. 일론 머스크는 “우리의 전체 제품 로드맵은 스페이스볼에서 뽑아낸다”라는 농담을 던질 정도로 이 영화의 광적인 팬으로 알려져 있죠. <스페이스볼>에서 다스베이더를 모티브로 한 빌런인 “다크 헬멧”은, 광속으로 달아나는 주인공 일행의 우주선을 추격하기 위해 속도를 높이는데요. 빛보다도 빠른 터무니없는 속도를 올려버린 나머지, 오히려 주인공의 우주선을 앞질러버리는 바람에 어이없게 추격에 실패합니다.
빛보다 빠른 플레이드 속도로 달리는 우주선을 보여주는
영화 <스페이스볼>의 한 장면 (출처: 유튜브)
이 때 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주변의 행성과 별들이 긴 꼬리를 그리며 빨려 들어가는 듯한 비쥬얼을 연출하는데요.
모델 S 플레이드에서도 똑같은 이미지가 연출됩니다. 앞서 플레이드가 “포르셰보다 빠른 차”로 홍보될 만큼 가속력에 있어선 타의추종을 불허한다고 이야기했었는데요. 플레이드를 정지 상태에서 가속하면, 실제로 계기판에서 영화 <스페이스볼>의 격자무늬가 나타나면서 이 미친 가속도를 재미있게 표현한다고 합니다.
순식간에 0km/h에서 250km/h로 가속하면서
계기판에 나타나는 이미지는 마치 우주선의 워프를 떠올리게 합니다
(영상 출처: 유튜브 CSP Shorts)
이런 SF 영화의 레퍼런스 차용은, 플레이드 하나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이버트럭은 SF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독특한 외관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트럭과 닮아, 일론 머스크 역시 사이버트럭을 수 차례 “블레이드 러너 트럭”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는데요. 지구의 고속도로보다 화성의 오지에서 달리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정도로 미래 지향적인 디자인 덕에, 대중의 호불호 역시 극단적으로 갈리기도 했습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트럭과 이를 오마주한
사이버트럭 (사진 출처: Reddit, 테슬라)
또 있습니다. 모델 X의 상징처럼 알려진 “팔콘 윙 도어”는 영화 <백투더퓨처>에 나오는 들로리안 DMC-12의 “걸 윙 도어”을 오마주 했는데요. 1981년 출시된 들로리안 DMC-12는 위로 열리는 방식의 도어를 위시한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이런 미래지향적이고 섹시한 디자인 덕에, 영화 <백투더퓨처> 시리즈에 타임머신으로 나오면서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기도 했습니다. 최근인 2018년에는 영화 <레디플레이어원>에서 주인공이 가상 세계에서 타고 다니는 자동차로 다시 한 번 출연하며 주목받기도 했죠.
영화 <백투더퓨처>의 타임머신으로 나오는
들로리언 DMC-12와 이를 오마주한 테슬라 모델 X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테슬라)
이렇게 테슬라는 미래적인 디자인으로 전기차가 곧 미래라는 인식을 대중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각인시킵니다. 하지만, 디자인이 단순히 미래지향적이기만 하면 대중이 환호하는 건 아닐 겁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이질적이고 독특한 디자인이라면 불호를 얻기도 쉽죠.
그렇기 때문에 테슬라는 자칫하면 생소할 수 있는 이 미래적인 디자인에 익숙함과 스토리를 입힌 겁니다. 사람들이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SF 영화 속 자동차에 대한 환상과 향수를, 어른이 되어 마주한 테슬라 자동차에서 다시 발견하도록 하는 겁니다. 덕분에 사람들이 테슬라의 낯선 디자인을 보면서도 친숙함과 애정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거구요.
현대차 역시 아이오닉5를 내놓으며 비슷한 전략을 구사했죠. 아이오닉5는 현대차에서 내놓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독특한 미래지향적 외관을 갖고 있습니다. 대신, 포니의 환생을 자처할 정도로 많은 디자인 모티브를 포니에서 가져오면서, 소비자들이 이런 낯선 디자인에서 익숙함을 찾을 수 있게 합니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아이오닉5의 주 구매층은 1970-80년대에 한국 도로를 달리던 포니를 보고 자랐을 50-60대라고 합니다.
포니의 환생을 자처하는 아이오닉5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현대자동차)
테슬라는 디테일도
목숨 걸고 만들었다
언뜻 보면 쉬워보이지만, 이런 영화 레퍼런스를 넣는 일이 테슬라에게 결코 손쉽지는 않았습니다. 일례로, 모델 X의 팔콘 윙 도어는 다른 자동차에는 잘 쓰이지 않는 특이한 전용 부품을 다수 필요로 한다고 하는데요. 이런 전용 부품을 수급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테슬라는, 차량을 계획대로 생산하지 못해 파산 위기까지 몰렸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목숨까지 걸고 만든 결과물인거죠.
이렇게 전기차를 대세로 만들기 위한 테슬라의 노력이 이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내연기관을 고집하던 전통 자동차 제조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전기차 올인 전략을 발표하고 있죠. 하지만 전기차를 목숨 걸고 만들었던 테슬라와, 아직도 내연기관에 미련을 남겨두고 있는 전통 제조사들 중 누가 유리할 지, 싸움의 결과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References
- 최초 양산형 전기차 ‘EV1’ 선보인 GM (연합매거진, 2017/12)
- Tesla is debuting the quickest-ever production car. But the question looms: Can Elon Musk still deliver? (Washington Post, 21/06/11)
- Tesla Model S Plaid Smashes Production EV Nurburgring Record Beating Porsche Taycan Turbo By 12 Seconds (Carscoops, 21/09/09)
- Elon Musk’s Cybertruck from Tesla Is Straight Out of Blade Runner and James Bond (Space.com, 19/11/23)
- ‘포니의 미(美)친 환생’ 아이오닉5, ‘견물생심’ 매력 분석 (매일경제, 21/03/24)
- 아이오닉 5 구매자 절반은 50~60대…V2L 옵션 최고 인기 (데일리안, 21/08/01)
일렉트릭 쇼크
찌릿찌릿하게 읽는 테슬라와 전기차 시장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