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전기차 관련 기사들을 보면 자주 접하게 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캐즘(Chasm). 깊은 틈 혹은 사람이나 집단 사이의 큰 차이를 뜻하는 단어인데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가 일반 대중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겪는 침체기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전기차가 캐즘에 빠졌다는 말이 나오는 건 아마도 (먼저)살 사람은 다 샀기 때문일 겁니다. 제품 수명 주기는 도입기에서 시작해 성장기와 성숙기를 거쳐 쇠퇴기로 이어집니다. 이익이 증가하는 시점은 성장기이고 성숙기에 이르러서야 이윤은 극대화됩니다. 경쟁자는 많아지지만 구매자도 더 많아지기 때문이죠.

구매자는 혁신자, 선각수용자, 전기다수자, 후기다수자, 지각수용자 등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새로운 제품이 출시되면 구매를 망설이지 않는 혁신자나 선각수용자는 제품의 도입기나 성장기 초기의 주 구매층입니다. 이들과 달리 첨단 기술에 대한 찬양보단 실용성을 우선하는 전기다수자와 후기다수자는 성숙기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립니다. 이 기다림으로 인해 수요 정체가 발생하는 거죠. 즉, 초기 시장에서 주류 시장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라는 말.

비싼 가격과 충전의 불편함이라는 대중적인 인식 때문에 업계에선 혁신적인 배터리가 나오지 않는 이상 ‘머글’들이 전기차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 거라 전망합니다. 최근 몇 년간 급격하게 성장한 전기차를 제치고 하이브리드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입니다.

시장조사업체 SNE 리서치는 2024년 전기차 판매량이 1641만 대를 살짝 웃돌 거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16%를 살짝 넘는 성장률이지만 33%가 넘는 2023년 성장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입니다.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 교통연구센터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올해 1분기 전기차 신규 등록대수는 약 7% 늘어난 반면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45%가량 증가했습니다.

전통적인 자동차 강국 영국과 독일뿐만 아니라 전기차 시장을 선도하는 나라 중 하나인 중국에서도 수요 정체에 직면한 듯 보입니다. 올해 1분기 중국에서 전기차 판매량 증가는 10%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하이브리드 판매는 60% 넘게 늘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앞서 전동화를 선포했던 여러 자동차 제조사들이 궤도를 수정하고 있습니다. 포드는 새로운 전기차 출시를 1~2년 정도 미루고 앞으로 6년 동안 전 차종에 하이브리드 모델을 도입한다고 합니다. GM도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모델을 확대한다고 하네요. 현대자동차도 스타리아에 이어 차세대 팰리세이드에 하이브리드를 더하면서 제품믹스 깊이를 더 깊게 가져가는 모양새입니다. 아무래도 전기차로 큰 수익을 내는 건 조금 더 먼 미래의 이야기인가 봅니다. 그래서일까요. 토요타가 말하는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의 균형에 귀를 더 기울이게 되는 요즘입니다.

며칠 전 한국토요타자동차는 경기도 용인시에 트레이닝 아카데미를 개소하는 자리에서 자동차 제조사의 탄소 중립 실천은 탄소 배출이 적은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라며, 전기차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모델을 통해 효과적으로 탄소 중립을 실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지역과 에너지 수급 상황을 고려해 가장 적합한 자동차를 공급하겠다는 것이 토요타의 설명입니다. 이를테면 신재생 에너지 생산이 높은 유럽과 같은 곳에선 전기차를, 화석 연료 의존도가 높은 지역엔 하이브리드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를 주력으로 하겠다는 겁니다. 이를 두고 토요타는 ‘멀티 패스웨이 전략’이고 부르더군요.

오는 2026년까지 토요타는 전기차 10개 모델을 라인업에 더해 판매량을 연간 150만 대까지 생각하고 있답니다. 하이브리드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는 배터리 효율을 높여 실용성을 더욱 극대화할 계획이라네요. 좋은 구성의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하기 위해서. 참고로 한국에선 하이브리드뿐만 아니라 전기차 라인업 강화를 위해 충천 인프라 확충을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토요타는 이를 토대로 2030년 전 세계에서 판매하는 자동차의 평균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019년 대비 33% 감소시키고, 2035년까진 50% 이상으로 줄일 것으로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글로벌 브랜드 중 가장 높은 수준의 탄소 중립 달성도 어려워 보이지 않습니다.

토요다 아키오 토요타 자동차 회장은 2024년 도쿄 오토살롱에서 탄소 중립 달성에 있어 엔진의 역할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믿고 있다면서 엔진과 배터리 모두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는 이 시대의 엔진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향해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오래전 배우 매튜 맥커너히가 출연한 미국의 어느 자동차 광고엔 이런 말이 나옵니다. 가끔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되돌아가야 한다. 되돌아간다는 건 아마도 출발점이 어디며 어떤 곳을 거쳐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 성찰해 보며 앞으로의 방향을 다시 가늠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중국산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탑재로 원가절감을 통한 실 구매 가격을 내린 테슬라는 제외하더라도, 전기차 보조금에 안주하며 기술 개발이나 가격 인하를 통한 친환경차 보급 확대에 대한 의지가 없어 보이는 일부 자동차 제조사들에 비하면 토요타의 이유 있는 역행(?)은 꽤나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수요 정체에 빠진 전기차. 캐즘에서 벗어나기까지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모르겠다는 건 저만의 착각일까요.

반박 시 님 말이 다 맞아요.

 

 

이순민
Power is nothing without style

 

 

이전 글세계 최초 테슬라 1000대 K-라이트쇼
다음 글친환경의 재정의, 토요타 프리우스 XLE 하이브리드 시승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