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압주의!! 재미는 있을텐데 솔직히 좀 깁니다…그럼 어쩌냐고요?
영상으로 보면 더 쫀☆득 [국내 최초 전기차 = EV9 아빠 이야기] ☛ (클릭하시면 재생됩니다)
기아자동차가 만든 국내 최초의 전기 대형 SUV! EV9의 흥행돌풍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사실 EV9 이전에도 기아자동차는 국내 전기차 역사에서 ‘독보적’이고 ‘독점적’인 입지를 선점한 ‘근본 K-전기차 회사’였습니다. 바로 1986년에 국내 최초로 ‘대한민국 1호 전기차’였던 ‘베스타 EV’를 만든 곳 역시 기아자동차였기 때문이죠.
▶국내 최초 전기차 스펙이 궁금하면?! ☛ 1부 보러가기 (클릭하시면 연결됩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왜 기아자동차가 이 전기차를 만들었는지’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90년대에 전 세계적인 전기차 개발 열풍이 불기 전까지, 80년대의 자동차 제조사들은 전기차 개발에 미온적이었습니다. 당시 ‘국산차 1위’를 차지하고 있던 현대자동차 역시, 본격적인 전기차 개발은 90년대에나 시작했죠.
하지만 국내 최초 전기차를 만들 당시, 기아자동차는 ‘내수 1위’도 , ‘글로벌 제조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기아는 80년대에 시대를 앞서간 국내 최초 전기차를 만들었던 걸까요? 어쩌면 전기차를 만들어야’만’ 했었던 가슴 아픈 속사정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 당시 기아를 둘러싼 시대적 상황에서 기아가 국내 최초로 전기차를 개발한 이유를 유추해 볼 수 있었습니다.
▶ 이빨 뽑힌 호랑이, 80년대 기아의 눈물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차’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많은 분들께서 ‘포니’를 떠올리실 겁니다. 하지만 국내 최초로 ‘국민차’로 인정받은 차는 다름아닌 기자자동차의 ‘브리사’였습니다. 기아는 1970년대 후반 들어 자동차를 생산하며 현대자동차보다 늦은 첫 걸음을 뗐습니다. 하지만 마쯔다 패밀리어 2세대를 베이스로 만든 ‘브리사’의 국산화율을 100%에 가깝게 달성하면서 최초의 ‘국민차’제조사로 인정받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국내 승용차 시장에서 현대를 맹추격하는 ‘2위’ 승용차 제조사로 성장하고 있었죠. 하지만 기아의 봄날은 길지 못했습니다.
1980년, 1212 군사반란 이후 집권한 전두환 군부정권의 [자동차 공업 합리화조치]로 기아자동차는 승용차 생산이 전면 금지됐습니다. 정작 승용차 시장에서 기아자동차보다 시장점유율이 적었던 ‘3위’ 새한자동차는 여전히 승용차를 생산할 수 있었지만, ‘2위’ 기아자동차는 하루아침에 승용차 생산이 금지되면서 도산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그나마 ‘대가족이 승용차 용도로 쓰기좋은 상용차’ 봉고를 생산하면서 기아는 간신히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기아자동차는 여전히 승용차를 판매할 수 없었습니다. 80년대 경제발전으로 경쟁사의 승용차 판매량이 나날이 증가하는 가운데, 기아는 이 시기부터 ‘기술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마치 ‘기술이 없어서 승용차 못 만드는게 아니다’라고 시위하듯 말이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시기 기아의 소름돋는 발명품 중 하나! 1983년 뉴욕 국제발명전에서 450여개 출품작 중 1위를 차지한 ‘파스칼의 원리를 이용한 제동유로조절장치’가 있습니다. 수동 차량이 언덕에서 정차 후 재출발 할 때 뒤로 밀리는 현상을 막아주고, 한번 브레이크를 밟으면 다시 엑셀을 밟을 때까지 브레이크를 유지해주는 장치로, 지금의 ‘힐 어시스턴트’와 ‘오토홀드’가 결합된 장치인 셈입니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에서야 해당 기능을 장착한 차량들이 출시되었던 걸 생각하면, 당시 기아의 발명품이 국제발명전을 휩쓰는 건 당연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 마침내 찾아온 절호의 찬스, 하지만…
한편 이 당시, 기아자동차는 ‘전두환 정권’과 친해지는 데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983년, 기아자동차는 법인세 기준 재계 순위 100위 밖으로 밀려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1983년, 전두환 정권 요인들이 대거 암살을 당한 북한의 폭탄 테러, 일명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이후, 전두환 씨의 호를 딴 ‘일해재단’이 설립되어 5공 측이 재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일해재단 운영비를 지원할 것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두환 정권 하에서 하루아침에 승용차 생산이 금지되었던 기아였던 만큼, 이때마저 밉보인다면 ‘끝장’ 이라는 위기감 때문이었을까요? ‘재계 순위’ 100위권 밖이던 기아는 바득바득 돈을 긁어모아 7억 5천만원을 바치면서 상납금 순위만큼은 상위권을 기록했습니다. 이런 노력 덕분이었을까요? 2년 뒤인 1985년, 정부는 1987년부터 기아의 승용차 생산을 다시 허가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기아는 이때를 기점으로 ‘프라이드’ 개발을 본격화하기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 일생일대의 국가적 이벤트,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이 개최됐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시네마, 섹스, 스포츠로 일컬어지는 3S 정책을 펼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죠. 86년 아시안 게임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개최한 국제 올림픽 대회였을 뿐만 아니라, ‘군부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에게 있어 정부 정통성을 국제사회에 인정받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연스럽게 국가적 차원의 지원과 관심이 아시안게임으로 쏠리던 상황이었죠.
기업들 역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치열한 판촉전에 돌입했습니다. 유튜브 다시보기가 없던 시절, ‘국가적 이벤트’를 중계하는 TV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죠. 기아의 승용차 생산이 금지당한 동안 국산차 업계의 정점에서 군림한 현대자동차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스텔라 등의 중형 승용차를 비롯한 290여대를 86 아시안게임 행사차량으로 지원하며 국민들에게 1위 자동차 회사의 위용을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기아는….
기아자동차는 87년부터 승용차 생산 재개가 허락되기는 했지만, 아직 ‘승용차 공장’으로의 전환이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기아의 미래를 짊어지게 될 ‘프라이드’생산 공장은 아시안게임이 종료된 이후에나 완공될 예정이었고, 따라서 기아자동차는 86년 아시안게임에서 홍보할 수 있는 ‘승용차’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설사 기아가 ‘프라이드’를 아시안게임 행사차량으로 지원했다고 가정하더라도, 현대의 중형 승용차 ‘스텔라’나 ‘소나타’와 비교한다면 상대적으로 초라한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했을 겁니다.
▶뭘 보여주긴 해야겠는데…’홍철 없는 홍철팀’ 신세였던 기아
그렇다고 기아가 아시안게임때 마냥 뒷짐만 지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겁니다. 유사이래 최초의 국제 스포츠행사였던 탓에 아시안 게임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엄청났을뿐더러, 이 당시 기아가 ‘높으신 분’들의 눈치를 엄청나게 봐 왔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기아 김선홍 회장이 대통령과 기업 총수들의 면담 자리에서 “본인이 스포츠를 좋아하는데 겨울에는 스포츠 경기가 없으니 심심하다. 기아는 운영중인 스포츠팀이 없으니 하나 만들어 보시죠?”라는 전두환 씨의 질문(?)를 받은 뒤, 부랴부랴 1986년에 기아 농구단을 만들었다는 언론인의 회고가 존재할 정도였으니까요. 기껏 87년부터 승용차 생산이 재개될 예정이었던 기아는, 승용차 생산 재개 직전에 정부로부터 ‘미운 털’이 박히는 일을 피하고 싶었을 겁니다. 결국, 마케팅적인 차원에서든, 친 정권적인 차원에서든 기아자동차는 ‘국가적 대 이벤트’인 86년 아시안게임때 무언가 활약상을 보여줄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문제는 보여줄 ‘승용차’가 없었다는 거죠. 그나마 기아자동차에게 그나마 ‘승용차’와 근접한 차가 존재하긴 했습니다. 바로 몇 년 전 히트를 쳤던 기아자동차의 구세주! ‘봉고’의 최신형 모델이었던 ‘베스타’였죠. 86년 초에 출시한 ‘베스타’를 아시안게임을 통해 홍보한다면 상당한 광고효과가 예상되는 상황이기도 했죠. 하지만 이 ‘베스타’를 86년 아시안 게임에서 홍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베스타가 ‘승합차’였기 때문이죠. 아시안게임 당시 현대는 스텔라, 그랜저, 소나타 등 자사의 고급 세단을 외국선수 임원진 VIP 의전차량으로 무상 공급했고, 해외에서 오신 ‘높으신 분들’이 현대차를 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홍보효과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외에서 오신 ‘높으신 분들’을 기아가 만든 ‘최신형 승합차’로 모셨다면? 의전 홀대 논란이 터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을 겁니다.
결국 ‘뭔가 보여는 줘야겠는데 보여줄게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베스타를 전기차로 개조해 ‘마라톤 중계용’으로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둔 기아의 유일한 선택지였다고 보여집니다. 비록 실제 판매사양과는 전혀 다른 ‘전기차’였지만 자사의 신차 ‘베스타’를 각종 매체를 통해 노출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고, 비록 기아자동차가 ‘승용차’는 없을지언정 대우나 현대에서 만들지 못했던(혹은 만들지 않았던) ‘국내 최초 전기차’를 만들었다는 ‘기술력’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었으니까요.
86년 아시안게임때 ‘대한민국 1호 전기차’를 공개한 이후, 기아는 순조롭게 승용차 시장에 진입했습니다. 하지만 ‘왕좌’를 탈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죠. 기아는 승용차 생산 재개 이후에도 현대자동차를 꺾지 못하는 ‘영원한 2인자’로 남아있었고, 이를 만회하려는듯 기아는 90년대에도 전기차 개발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심지어 90년대 초에는 ‘프라이드’를 활용한 전기차 상용화를 시도하는가 하면, 프라이드 전기차에 ‘태양열 전지’를 결합한 솔라 하이브리드 전기차까지 극소수 만들어 일부 관공서에 납품하며 기술력을 과시했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이었는지, 90년대 기아자동차의 별명은 ‘기술의 기아’였죠.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아는 끝내 ‘2인자’의 한을 풀지 못하고, 현대자동차에 흡수되었습니다.
▶ 하지만…’전기차 시장’에서도 계속되는 2인자의 눈물?
다행히(?) 현대에 흡수된 이후로도 기아의 전기차 연구개발은 계속되었습니다. 다만 이전과는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죠. 기아자동차가 현대에 흡수된 이후, 기아의 전기차를 살펴보면 ‘큰형님’인 현대를 위한 ‘실험용 모르모트’로 쓰여온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특히 기아의 ‘소울 EV’와 현대 ‘아이오닉 일렉트릭’사이에서 목격됐던 ‘내로남불’현상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소울 EV를 출시할 당시 ‘차 값을 올리면서까지 주행거리를 더 늘릴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지만, 당장 그 소울 EV의 국내 흥행은 시원찮았죠. 하지만 그 뒤로 ‘아이오닉 일렉트릭’을 출시할 때에는, 기존 아이오닉 하이브리드 모델보다 승차감이 나쁜 ‘토션빔 서스펜션’을 써서 배터리를 장착할 공간을 확보한 덕분에 소울 EV보다 긴 주행거리를 확보했습니다.
그나마 전기차 시장의 전체적인 파이가 확대된 뒤로는 패밀리카 성향의 아이오닉5, (상대적으로) 스포티한 성향이 강한 EV6, 전기 세단 아이오닉6등 비교적 상호보완적인 상품설계가 이뤄지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이번 EV9에서 기아가 ‘총대’를 맨 것으로 보이는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스위블 시트’가 그 지점이죠.
스위블 시트는 과거 기아 ‘프레지오’나, 현대 스타리아(신형 스타렉스) 등 승합차에 적용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SUV에 적용되는 건 EV9이 최초였죠. 정작 EV9에서 ‘별도 옵션 광고’까지 내보낼 정도로 대대적인 사양으로 홍보했지만, 실제로 출시된 뒤 스위블시트는 상당히 호불호가 갈리는 옵션으로 취급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사실 EV9보다 더 먼저, ‘스위블 시트’가 탑재될 대형 SUV라고 홍보했던 차량이 존재했습니다. 앞으로 출시될 예정인 현대의 전기 대형 SUV, ‘아이오닉7’ 컨셉트카였죠. 그동안 ‘승합차’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스위블시트를 SUV에 적용한다는 ‘총대’를 EV9이 먼저 매게 된 셈이죠.
▶ 그래도 1등은 1등이다!
하지만 그래도 1등은 1등입니다. 기아자동차는 EV9을 출시하면서 국내 최초 전동화 대형 SUV를 만들었다는 트로피를 거머쥐었습니다. ‘국내 최초의 전기차’ 였던 베스타 EV, ‘국내 최초의 전기 상용차’ 레이 EV에 이어 전기차에 관련된 ‘국내 최초’ 타이틀 3관왕을 달성하게 된 셈이죠.
특히 EV9은 최소 7500만원 이상, 최대 1억원 이상의 ‘고가’ 차량이라는 눈총에도 불구하고 다른 경쟁 대형 전기 SUV에 비하면 (아직까지는) 저렴한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해외 자동차 커뮤니티에서도 관심을 갖는 소비자들의 모습이 심심찮게 포착됩니다.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고압전류로 지져버릴지어다! 과거 손발이 묶인 상황에서 ‘최후의 발악’이나 다름없었던 ‘기아의 전기차’가, 기아를 글로벌 네임드 자동차 제조사로 도약시킬 새로운 성장동력이 되고 있는 셈이죠.
차돌박이
차에 대한 소식을 즐겁게 전해드리는 차똘박… 아니 차돌박이입니다.